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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 그리고 반지성주의 - Position Paper 전형준 2018-10-05 07:24:24  

 
전형준
(실제 작성된 hwp에서 각주 등이 입력되지 않아 불완전하며, 계속 작성 중에 있는 내용입니다)

집단지성, 그리고 반지성주의

전문가의 신화
지난 시간 토론했던 ‘집단지성’은 전문가가 생산하는 지식이 반드시 중립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물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전문가들의 거만하고 권위주의적 태도는 일반인들에게 반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앨런 소칼(2014) 앨런 소칼(2014). 지적사기, 한국경제신문사.
은 자신의 저서에서 사회과학에 심한 허풍이 있으며 특정한 텍스트들의 난해하다는 것은 그 텍스트가 아무것도 뜻하는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약어 S(⏀)rk 먼저 기표로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중략)
동일한 성질을 가진 기표들의 쌍은, 동일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자체로는 완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기표는 원으로부터 유래하되 원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표들의 전체 집합 중에서 (-1) 의 속성으로 기호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될 수 없기는 하지만 이서의 작용까지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명사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의 진술은 곧 이것의 의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의미 작용을 대수식에 따라서 계산하면 이렇게 됩니다. 즉,
S(기표)
---- = s(진술)에서 S=(-1) 이니까 s=√-1이 된다.
s(기의)

<라캉, 1997b:p316~317, 원래의 세미나는 1960년에 개최>

위 라캉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을 본인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대학원을 다니는) 우리가 연구를 위해 책과 논문을 읽을 때도 이런 글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앨런 소칼은 ‘신화’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전문가들의 폐쇄적인 특권의식으로 인해 집단지성은 발현된다.(추가 서술)

집단지성의 조건
주형일(2012)은 집단지성 자체가 그것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모두 동등한 참여자로 간주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에 전문가와 일반인을 나누고 전문가 지성과 대중지성을 구분하는 것은 집단지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제대로 된 집단지성이 발현된다면 집단지성의 형성 과정에서 전문가와 일반 대중의 구분은 불가능·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단지성에서 전문가와 일반 대중을 구분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의 말과 생각에 차등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차등적 권력은 전문가로 분류된 사람의 말은 경청되며 일반인으로 분류된 사람의 말은 무시 또는 참고 사항에 머문다는 것이다. 전문가나 지식인이라고 그들의 의견이 더 중요시 되거나 더 경청돼서는 집단지성이 발현될 수 없으며 그 분야에 무지한 사람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돼서도 안 되며 집단의 구성원들이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돼야만 비로소 집단지성이 발현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고 다른 사람은 지적 능력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 집단의 의견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간주된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두가 자유롭고 동등하게 참여하는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의 발현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형일 (2012). 집단지성과 지적 해방에 대한 고찰.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13(2),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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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라는 계층)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지성 이론은 이론에 머문다고 본인은 주장하고자 한다.

집단지성의 한계
주형일(2012)의 연구 마지막에서도 집단지성이 진정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협업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지적 능력을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조건이 충족돼야만 비로소 집단지성 발현을 위한 유용하고 편리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계층 지으며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추가 서술)
과거 노량진 컵밥집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적이 있다. 논쟁의 쟁점은 컵밥집은 주머니가 가벼운 고시생들을 위한 시설이며 컵밥집 운영자들 또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어려운 사람들이기에 노정상은 불법이지만 운영을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의견과 불법인 컵밥집은 어쨌든 불법이기에 철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앞 의견 동의하는 집단은 자신들이 더 감정적이고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야 함을 주장했고 뒤 의견에 동의하는 집단은 자신들의 이성적임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앞의 의견이 우세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자의 의견이 대부분이다. 결국 인터넷 상에서 벌어진 노량진 컵밥의 논쟁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지성은 변모했다.  

반지성주의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별다른 제약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도구로 인해 네트워크상에서의 집단극화가 나타났다고 본다. 이제 인터넷 공론장에서 집단적 행동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이러한 집단극화는 동일한 목적 등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Wallace, 1999) Wallace, P. M. (1999). The psychology of the internet.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 이러한 집단극화는 전문가를 믿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반지성주의’로 변화되었다(이 부분의 레퍼런스 검색 시간 부족).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의 일본인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반지성주의가 단순한 무지 상태가 아닌 “외골수의 지적 열정”이라고 지적한다. 즉 반지성주의자는 지식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지식과 판단에 대한 확신으로 새로운 정보나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고 말한다 최철웅,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경희대학교 대학원보』 217호,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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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예로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이하 안가키)’ 사건을 들 수 있다. 2013년 네이버에 ‘자연주의 육아’를 표방하는 <안아키>란 카페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열이 나도 아이에게 해열제 쓰지 않기, 아토피에 연고는 물론 보습용 로션도 바르지 않기, 백신 맞지 않기 등 현대의학의 원칙을 부정하는 말을 퍼뜨리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약의 대안으로 발효식과 해독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카페 회원들이 모여 장을 담그는 행사를 열고, 숯가루를 판매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이들에 의하면 아토피는 피부에 열이 쌓여 생기므로 땀을 내어 열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긁어서 큰 상처가 나면 땀구멍보다 더 큰 구멍이 나므로 열이 더 잘 빠져나가며 긁어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들은 건강한 아이를 낳았는데 병원에서 아픈 아이를 만든다”라거나 “엄마들은 직장에 다니랴, 아이를 키우랴 정신이 없다”는 감성 어린 위로도 적절히 섞었다. 햇볕 많이 쬐기, 밖에서 많이 뛰어놀기 등 건전하고 바람직한 육아 원칙도 함께 권유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보기엔 올바른 방향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차차 무리한 치료로 피해를 보는 어린이들의 사례가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예방접종을 받지 않고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들 때문에 갈등이 생겼고, 한쪽 부모가 안아키에 빠져 가정불화를 겪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인터넷에 아토피를 치료하지 않아 피부가 상한 아이들의 끔찍한 사진이 돌더니, 급기야 열이 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티다 뇌막염의 치료 시기를 놓쳐 영구 장애가 남았다는 이야기까지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다 http://webzine.rihp.re.kr/webzine_201710/a_04_01.html
. ‘안아키’ 부모의 자연치유법은 병원의 상업화된 현실을 비판하고 일부 의료 소비자들의 기존 제도권 의료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안아키’의 주장은 기든스, 벡, 래시 등이 논한 ‘성찰적 근대화’, ‘위험 사회’ 연구를 가져올 수 있다 ‘개인화’는 개인이 피해갈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현상이 아니며 ‘개인화’가 개인에게 강제된, 개인의 의지로는 피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고은강 (2011). ‘위험사회’에서 ‘자기계발’의 윤리학에 관한 小考. 정신문화연구, 34(4), 9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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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거리들의 범위가 더 넓어질수록, 그리고 그것 중에서 결정해야 할 필요가 더 커질수록, 더 많은 개인이 생애 조정과 생애 통합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남자고 여자고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하고, 임기응변하고, 목표를 정하고, 장애를 인식하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해야 한다.
표준생애 대신에 이제 “골라잡는 생애”, 사실상 “‘알아서 해’ 생애”가 들어선다.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그들이 대응할 능력이 있건 없건 일어난다. 실상, ‘알아서 해’ 생애는 언제나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생애이며, 끝도 없이 잠재하는 위험들로 가득하다.
<울리히 벡 외 저, 󰡔위험에 처한 세계와 가족의 미래󰡕> 울리히 벡 외 저, 한상진·심영희 편저, 󰡔위험에 처한 세계와 가족의 미래󰡕(새물결, 2010), 128쪽.


최철웅은 ‘선비질’, ‘씹선비’, ‘진지충’ 같은 용어를 만들어낸 일베류의 행태를 통해 한국식 반지성주의가 반지식인주의라는 점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역설’이나 인문·사회과학적 숙고를 허락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의가 반지성주의의 기저에 깔린 요인들이라 주장한다 최철웅,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경희대학교 대학원보』 217호,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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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구와 기사들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일베 등이 반지성주의의 발현이라면 다른 커뮤니티나 단체는 지성주의인가? 어떠한 단체가 지성적인 단체인가?
두 번째, 지성과 반지성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세 번째, 누가 지성과 반지성을 판단할 것인가? 그것은 나누는 자는 전문가인가? 반전문가인가?

어딘가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분에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도 세계는 망하지 않고 있다. 그 말은 들은 자리가 토론장은 아니었기에, 그분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보아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최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과 네티즌의 언쟁이 뜨겁다. 이러한 언쟁이 전문가의 위치를 위축시키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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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의 집단지성과 권위
[포지션페이퍼1차] 경험을 공유하라 : 온라인과 집단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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